최고관리자 | February 17, 2014 | view 3,810
2002 l 김동욱 l 장지아, 시스템에 저항하는 여전사 l 아트인컬처 
장지아/ 시스템에 저항하는 여전사
young artist
art in culture 2002. 11

현실은 단단하다. 시스템화된 사회의 권력구조. 그 속에서 꿈꾸는 자라면 ‘이것’아니면 ‘저것’이라는 절대명제 속에서 ‘정상’ 아니면 ‘비정상’ 사이의 틈새를 찾기란 힘들다. 어차피 중간지대가 불가능하다면 이성의 금기를 과감히 위반하고 광기를 불러들이는 것이 스스로를 옥죄는 현실에서의 탈출구다. 미셀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가 이성과 권력의 역사라 한다면, 광기의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 해방을 위한 새로운 지평이라 말한바 있다.
새벽 4시 반, 가슴을 드러낸 채 길거리를 걷는 여자가 있다면 누구든 ‘미친X’이라고 조롱할 것이다. 장지아는 ‘portrait’(1999)에서 바로 이러한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드럭에 취해 집으로 들어가는 상황, 일요일 새벽이라 간간이 새벽기도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새벽의 푸른 기운이 감돈다. 조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몽환적인 색이다. 하지만 걸음은 당당하다. 현실과 꿈이 뒤섞이며 장지아는 그리도 경쾌하게 현실에서 일탈을 감행했다. ‘꿈’은 현실이다.

감시가 체계화된 사회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것이 있다. 19세기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가 벤담이 제안한 원형감옥으로 ‘모든 것을 다 본다 (pan: all + opticon: seeing)'는 뜻을 지니는 말이다. 파놉티콘은 ‘시선의 비대칭성’을 핵심구조로 하는데, 간수는 모든 죄수를 볼 수 있으나 죄수들은 간수를 볼 수 없게 설치되어 있다. 이는 죄수로 하여금 자신이 늘 감시당한다는 환영을 갖게 하여 마침내 감시를 스스로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이뤄지는 감옥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을 영혼의 통제를 가능케 하는 ‘감시의 원리’를 체화 된 권력의 기술로 보았다. 이러한 규율권력은 감옥에 한정되지 않고 모세관처럼 사회 전 분야에 파급되어 우리를 통제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장지아는 이처럼 감시와 통제가 체계화된 사회에 과감히 저항한다. 최근작 [약물을 통한 신체오감의 이상변화]는 작가를 도덕적, 윤리적 잣대로 검열하는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물음이다. 작가에게 엑스터시(일종의 마약류)를 복용케 하고, 5분 단위로 반응을 체크한다. 등장인물은 총 4명으로 의사(닥터 페퍼), 보조 관찰자(Mr. 파놉티콘), 카메라맨(카메라 옵스큐라 oops) 그리고 실험대상(아트디렉터)이다. 실험대상 역으로는 장지아 자신이 직접 출현했다. 전시장 한켠에 놓인 처방전에는 ‘350ml 투여- 약간의 구토증세’부터 ‘약간의 환각상태’ ‘현실감각 마비’ 등과 같은 약물 투여에 따른 신체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험이 진행됨에 따라 작가는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도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거나 하는 등의 점점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묻는다.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그가 보기에 사회의 규범에 딱 들어맞는 그들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한약봉지를 물고 있다. 이는 마약일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의 색안경 쓴 시선을 돌려 치며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선입견을 흔든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그렇다면 장지아는 무엇으로 이 ‘극히 정상적인 사회’에 저항하는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어차피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I'm sixteen](2001)은 일반적인 체위에서 오럴섹스, 어널섹스, 69섹스, 사디즘, 그룹섹스, 동성애, 수간 등 다양한 성애를 연속화면으로 보여준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아무렇지도 않게 드로잉이 반복된다. 따라서 음침하거나 억압적이지 않고 밝고 즐거운 파티 같다. 그들은 성적 놀이를 통해 쾌락의 한계까지 밀고 나가려고 한다. 프로이드는 ‘도착’에 대해 성욕이 단순히 ‘생식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배출구를 찾아 몸 전체로 확산되어 모든 감각을 포함하는 ‘승화현상’으로 설명했다. 또한 이때 정신적 충족과 함께 예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바로 그 지점, 장지아가 찾는 예술의 원동력이다. 숨막힐 듯 평범한 일상은 성적 판타지로 일탈을 감행하며, 승화되는 것이다. “왜 하필 열 여섯 살인가?” 라는 질문에 “ 생애에 감성과 현실이 가장 극렬히 충돌하는 시기”라고 작가는 말한다.
I'm sixteen (나는 열여섯 살이에요)
Is there any other world?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있나요?)
Please let me know (알려주세요)
I want to know (알고 싶어요)
I'd like to know (정말 알고 싶어요)
경쾌한 음악에 맞춰 서두에 이와 같이 시작된 자막은 Can I be happy now? (이젠 행복해도 될까요?)로 끝난다. 열여섯. 그녀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 가장 왕성한 감성이지만 두터운 현실은 그녀에게 이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녀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시스템을 파괴하라
디지털 사진형식의 비디오 작품 [한번도 의심해 본적 없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1분간의 묵념](2001)은 인류가 인정하는 절대가치에 알게 모르게 마취되어 있는 우리의 관념을 일깨운다. ‘사랑'(Please love me)이라는 가치는 분홍장미로 ‘자유’(I'm dreaming of freedom having no boundary)는 푸른 바다와 뭉게구름으로, ‘반성’(I reflect on myself)은 낙엽지는 오솔길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인터넷에서 단어를 쳤을 때 가장 흔히 나타나는 이미지들로, 우리의 뇌리에 무의식적으로 각인 돼 있던 것이다. 각각의 화면은 1분간 정지돼 있다 사라진다. 자, 생각해보자. 과연 사랑이라는 것이 항상 장밋빛일까? 또한 자유는 휴양지의 시원한 푸른 하늘이며, 반성은 낙엽지는 오솔길인가?
이처럼 작가는 제도화된 권력에 저항하고, 그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우리의 인식을 일깨운다. 푸코가 말한 규율권력은 오늘날 사회의 전 분야에서 우리를 감시하며 통제하고 있다. 그 숨막힐 듯한 사회에서 그녀는 단단한 일상을 도발적인 감수성으로 부수고 그 틈새를 찾는다. 그리하여 그녀가 찾는 틈새는 [Remember](2001)에서 보듯 일상을 뛰어넘는 환상이다. 프랑스 테크노 그룹 AIR의 노래 ‘Remember'에 맞춰 진행되는 미디어 플레이어의 가상적인 이미지는 마치 오르가즘에 정점, 환희의 극치에 이른 순간의 이미지 같다. 일상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감각의 틈새, 그러나 그것은 위험하다.
18세기의 환상적이고 혁명적인 작가 사드는 [소돔 120일]에서 모든 종류의 성적 일탈행위를 기술했다. 패륜적인 글쓰기, 부도덕한 사디즘으로 인해 거의 온 생애를 감옥에 갇혀 보냈다. 말년에 그는 정신병자들을 모아 [미치광이들]이라는 연극을 만들기도 했으나, 끝내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작가 장지아가 내뿜는 광기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지켜볼 일이다. 아직 설익었지만 그것은 신선하고 당당하다. 이성과 도덕으로 점철된 이 세계에 대한 저항. 현실과의 다리를 놓을 것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극한까지 갈 것인가. 작가 장지아에게 남겨진 새로운 선택이다.

김동욱기자